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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앞에 선 영화 (박하사탕, 설경구, 오늘의 시선)

by youngjae38 2026. 1. 19.

영화 박하사탕 애니메이션 이미지

 

2000년 초, 국내 영화계에 한 편의 실험적이면서도 강렬한 영화가 등장했다. 이창동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박하사탕. 그 안에는 당시로선 낯설고 파격적인 시간 역행 서사 구조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설경구’라는 배우의 놀라운 연기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영화는 단순한 개인 서사를 넘어, 한국 사회가 겪은 시대적 트라우마와 청춘의 상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었다. 2026년, 지금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떤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을까?

무너진 청춘의 초상, 박하사탕 시대의 얼굴을 담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의 시작이자 결말이 되는 이 외침은, 단지 한 인물의 후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자, 이 사회가 만들어낸 세대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고백이다. 주인공 김영호는 20년이라는 시간을 거꾸로 되짚으며 한 사람의 붕괴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붕괴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1980년대 군부 정권, 민주화 운동, 경제 성장과 그 이면의 침묵, 그리고 1990년대의 무기력. 김영호는 단지 한 남성이 아니라, 시대를 통과한 청춘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그를 연기한 설경구는 ‘배우 설경구’라는 이름을 이 작품에서 완전히 각인시켰다. 당시로선 드물었던 시간 역행 서사와 감정 밀도 높은 연기,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건조한 연출. 박하사탕은 관객에게 쉬운 감동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불편함과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더 오래, 더 깊게 남았다. 2026년 현재까지도 이 영화가 ‘시대의 초상’으로 회자되는 이유다.

설경구라는 배우의 발견, 그리고 진짜 연기란 무엇인가

박하사탕 이전까지 설경구는 연극 무대와 몇 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던 배우였다. 이 작품은 그를 완전히 주연 배우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였다. 무엇보다도 인생이 무너지는 과정을 거꾸로 연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의 고조가 아닌 퇴적, 절망의 축적이 아닌 해체를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설경구는 이 어려운 연기를 놀라운 집중력으로 해냈다. 그가 연기한 김영호는 처음에는 무기력한 40대 남성으로 등장하지만,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순수했던 청년, 사랑 앞에서 수줍던 소년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설경구는 얼굴 표정 하나, 목소리 톤 하나로 시간을 되감는다. 그 속엔 어떤 과장도, 연기 흉내도 없다. 오직 진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후 설경구는 오아시스, 실미도, 공공의 적, 불한당 등 다양한 작품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이어가며 충무로의 중심 배우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박하사탕을 꼽는 이유는, 단순한 연기 잘함을 넘어, 그 영화에서 그는 ‘한 시대의 감정’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2026년 지금 돌아보면, 이 영화는 단지 신인의 성공이 아니라, 한국영화계가 만난 한 ‘진짜 배우’의 시작이었다.

오늘 다시 바라보는 이창동의 실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당시 국내 영화계에서도 드물었던 구조적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었다. 시간 순서를 거꾸로 배치한 구성은 관객에게 일종의 퍼즐을 푸는 경험을 제공했다. 단순히 이야기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흐름까지 역행하게 만든 이 연출 방식은 이후 수많은 감독에게 영감을 줬다. 하지만 이 실험은 단지 구조적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시간이라는 틀 속에서 더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만큼 박하사탕은 정교하고 의도적인 작품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사회와 인간을 응시한다. 초록물고기, 오아시스, 밀양, 버닝까지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예술영화를 넘어서, ‘기억과 감정, 사회적 메시지’를 관통하는 일관된 시선을 담고 있다. 박하사탕은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영화다. 2026년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묻는다. 과연 이 사회는 청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누군가의 외침 “나 다시 돌아갈래”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26년 전, 박하사탕은 관객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2026년 지금, 그 충격은 회상이 아닌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상처는 여전히 유효하다. 설경구는 그 상처의 얼굴이었고, 이창동은 그것을 정직하게 바라본 연출가였다. 지금 박하사탕을 다시 보는 것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다.